영화와 TV 드라마는 언제나 경쟁해왔다. 하지만 이제 드라마에 대한 영화의 우월감은 곳곳에서 위협받고 있다.
와 <로스트> 그리고 <히어로즈>로 이어지는 미드 열풍은, 영화와 드라마가 전혀 다른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일러준다.
요즘 소위 ‘미드족’들에게 새로이 뜨고 있는 TV 드라마는 지난 4월부터 쇼타임 채널에서 방영에 들어간
<튜더스>다. 헨리 8세의 궁정 이야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는 <튜더스>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조나단 라이
메이어스를 볼 수 있어서다. 최근 영화 <매치 포인트>(2005)와 <미션 임파서블 3>(2006)을 통해 만날 순
있었지만 <튜더스>에서 뿜어내는 매력은 그보다 더 빛난다. 그는 지난 2005년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CBS의 전기 TV 시리즈
<엘비스>에 엘비스로 출연한 적도 있었기에, 이들 미드는 관심 있는 배우의 다른 모습을 접할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됐다. 덧붙여
<튜더스>에서는 <윔블던>에서 잠시 볼 수 있었던 샘 닐 아저씨도 만날 수 있고, <엘비스>에서는 영화
<터미네이터 2>의 액체 터미네이터 T-1000으로 기억하는 로버트 패트릭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로버트 패트릭은 드라마
<엘비스>에서 엘비스의 아버지로 나오고, 영화 <앙코르>에서는 쟈니 캐쉬의 아버지로 나오니,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는 이
절묘한 캐스팅이란! 정말 기분이 묘하다. <프리즌 브레이크>를 통해 ‘석호필’ 웬트워스 밀러라는 새로운 스타의 출현을 목격하는 것도
즐겁지만 <24>의 키퍼 서덜랜드, <히어로즈>의 에릭 로버츠, <스미스>의 레이 리오타,
<제리코>의 스킷 울리히, <샤크>의 제임스 우즈를 보는 것도 미드가 주는 색다른 즐거움 중 하나다.
★영화 속편보다 궁금한 다음 시즌

최근 몇 년간 접한 영화, 드라마, 만화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드라마
<하우스>(2004-)의 ‘닥터’ 그레고리 하우스(휴 로리)였다. 괴팍한 성격에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모든 환자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의사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성미 까다로운 의사다. 독설이 끊이지 않아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하지만 매회 특별한 병을 지닌 환자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유능한 전문의이기도 하다. ‘저 인간을 좋아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는 점에서 한국 드라마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바꿔 말해 최근 몇 년간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 하우스만 한 매력적 캐릭터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캐릭터를 넘어 작품으로 파고들면 재미있는 구석이 더 많다. 가령 <24>의 테러방지단,
<CSI>의 현장감식반, 주로 뼈를 다루는 <본즈>의 법의학 특별수사대, <크리미널 마인드>의 행동분석팀,
<덱스터>의 혈흔분석 전문가 등 소위 범죄스릴러 장르의 대표적 미드들은 치밀한 전문성을 요한다.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시나리오와 스피디한 전개에는 감히 다른 나라 드라마가 따라갈 수 없는 월등함에 있다. 가령 국내에 Sci Fi 채널 같은 SF 전문 채널이
생기리라 기대하는 것도 지금 당장 한국영화계에 <트랜스포머> 수준의 영화를 기대하는 것처럼 생경한 일일 것이다.
사람들이 미드에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 영화로도 체험하지 못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최근 몇 년간 급격하게 변화해온 매체환경과도 맞물려 있다. 영화와 비교해 과거의 <스타 트렉>
<X파일> 역시 그러한 혁신적 지점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지만, 명백하게 미드가 영화와 대등한 지위로 올라서게 된 것은 역시
2000년 <CSI>가 시작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구경거리로서의 영상’이라는 측면에서 드라마가 영화를 압도할지도 모른다는 인상적
순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섹스 앤 더 시티>나 <웨스트 윙> 같은 드라마들도 역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기존의 TV
드라마들과 규모나 스타일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면, 와 그 이후의 <로스트>(2004-)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갔다.
또한 2000년은 HBO가 본격적인 드라마 제작에 나선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 사람들은 ‘디렉터스 컷’뿐만 아니라 ‘프로듀서스
컷’이란 것에도 관심을 가진다. 프로듀서스 컷은 지상파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추가 장면과 드라마에 대한 추가 해설이 덧붙여진 것으로, 영화로
치자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디렉터스 컷과 마찬가지다. NBC는 지난해 업계 최초로 이 서비스를 시작했다. 인터넷의 시대, TV 드라마가
영화를 압도할 여지는 더 커 보인다.
<스파이더맨 3>를 보면서 무지 길다고 느꼈다. 영화가 지루해서 길다고 느껴진 게 아니라 정말
영화가 길었다는 말이다. 전작들에 비해 악당 수도 셋으로 늘고 피터(토비 맥과이어)와 메리 제인(커스틴 던스트), 해리(제임스 프랑코)의
삼각관계까지 더해져 마치 3개의 에피소드로 나뉜 한 편의 미니시리즈를 연이어 본 느낌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즐겁게 관람함과 동시에 ‘4편에서는
어쩌려고?’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팬들은 3편보다 수적으로 더 많고 강력한 적들이 등장하길 원할 테고, 그렇게 새로운 인물들이 추가될수록
러닝타임은 더 늘어날 테다. 실제로 <스파이더맨 3>는 전작들보다 무려 10분 이상 더 늘어났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샌드맨(토마스 헤이든 처치)의 가족사가 궁금해지기도 하니, 그 시간으로도 딱히 성에 차는 건 아니다. 샌드맨 역시 <엑스맨>에서
<울버린>과 <매그니토>라는 스핀오프(한 영화의 캐릭터를 가져와 또 다른 독립된 작품을 만드는 것)가 빠져나올 예정이듯,
새로운 영화로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해지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관객들은 앉은 자리에서 한 편으로 끝장내길 원하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궁금하다. <스파이더맨 4>는 과연 어떤 규모로 돌아올까?
시간 얘기로 시작해보자. 어쩌면 지금의
영화는 ‘러닝타임’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한계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보듯 소위 극장을 휩쓸었다고 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이제
2시간을 넘기는 건 예사다. <스파이더맨 3>는 말할 것도 없고 곧 개봉할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도 3시간에
육박한다. 반면 애니메이션 <슈렉> 시리즈는 곧 개봉할 3편에 이르기까지 모두 95분을 넘지 않는다. 그 다음 주자인 <오션스
13>은 어떤가? 친절하게 제목에서도 알려주고 있듯, 전편들보다 러닝타임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요 <오션스 일레븐>(2001)을
시작으로 <오션스 트웰브>(2004)를 거치며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추가되고 있다. 그럼 이 시리즈 역시 과연 ‘나인틴’ ‘트웬티’까지
계속 나아갈지도 모른다. 보통 ‘90분’이라 얘기되는 상업영화의 암묵적 규칙이 깨진 건 무척 오래된 일이다. 영화도 이제 TV 미니시리즈처럼
갈수록 할 얘기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런 영화와 TV 드라마의 첫 번째 대결로 기록될 만한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1997)이다.
<타이타닉>의 러닝타임인 195분은 당시로선 실로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하루 4회 상영밖에 할 수
없었고,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3시간의 러닝타임을 훌쩍 넘어선다는 것은 모험이라기보다 제임스 카메론 개인의 투쟁에 가까웠다. 137분의
<에이리언 2>(1986)를 시작으로 가볍게 2시간을 넘기기 시작한 그는 이미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과
<트루 라이즈>(1994)에서도 2시간에서 20분 이상을 훌쩍 넘기는 모험을 계속해왔다. <타이타닉>이 거둔 성공은
후반부의 강력한 특수효과에 힘입은 바 크지만, 사실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는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러브스토리가
핵심이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전세계적인 흥행돌풍을 일으켰고 이후 많은 영화들이 2시간 이상의 러닝타임을 용기 내 시도하는 데
중요한 전범이 됐다. 또한 그것은 현대 상업영화가 직면한 러닝타임의 위기를 돌파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제임스 카메론이 열어놓은
길을 후배 감독들이 이었다. 러닝타임 파괴의 후계자는 마이클 베이다. 118분의 <나쁜 녀석들>(1995)은 무난한 수준이었지만
141분의 <더 록>(1996)을 시작으로 145분의 <아마겟돈>(1998), 177분의 <진주만>(2001),
143분의 <나쁜 녀석들 2>(2003), 135분의 <아일랜드>(2005)까지 그도 TV 드라마의 자유로운 러닝타임과
싸워온 대표적인 감독이다. 특히 3시간에 육박한 <진주만>은 이야기 구조에 있어 <타이타닉>의 절대적 벤치마킹처럼 보였다.
올여름에 찾아올 그의 신작 <트랜스포머> 역시 러닝타임이 그에 못지않다고 한다.
<타이타닉>의 러닝타임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피터 잭슨 역시 <킹콩>(2005)으로 186분을 기록했다.(물론 그에게는
199분이라는 최고기록의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이 있지만 오리지널 원작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단 제외하기로 한다)
1933년에 만들어진 오리지널 <킹콩>(1933)이 100분, 그 리메이크작인 존 길러민의 <킹콩>(1976)이
136분이었음을 감안하면 실로 대대적인 수술이 더해진 셈이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은 갈수록 러닝타임을 늘리길 요구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스펙터클하게 보여주기도 해야 하지만, 계속 더 많이 보여줘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영화에 있어 ‘2시간 안팎’이라는 애매모호한 장편개념은 갈수록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영화도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들의
러닝타임 증가 추세
<매트릭스>(1999) 136분 ▼ <매트릭스 2:
리로디드>(2003) 138분 ▼ <매트릭스 3: 레볼루션>(2003) 128분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2001) 178분 ▼ <반지의 제왕 2:
두 개의 탑>(2002) 177분 ▼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2003)
199분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
152분 ▼ <해리 포터의 비밀의 방>(2002) 162분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 141분 ▼ <해리 포터와 불의 잔>(2005) 156분 ▼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2007) 142분
<스파이더맨>(2002) 121분 ▼ <스파이더맨 2>(2004)
126분 ▼ <스파이더맨3>(2007) 139분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2003) 143분 ▼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2006) 143분 ▼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2007) 168분

★다른 길 가는 미드와 영화
 영화와 TV의 대결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TV의 등장과 더불어 몰락하리라 여겼던
‘오락으로서의 영화’는 TV 브라운관의 저예산과 제한된 화면을 압도하는 여전한 구경거리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러닝타임의 한계를 비롯, 영화는
다시 한 번 TV 드라마의 거센 공격에 직면해 있다.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방영시간과 캐릭터 수는 영화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TV 드라마의
강점이다. 어쩌면 최근 모든 영화들이 시리즈를 거듭하며 러닝타임이 길어지고 캐릭터 수가 늘어나는 것은, 전편과의 싸움이라기보다 당대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 최신 미드와의 싸움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가 TV가 재현하지 못하는 관람자의 스펙터클한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반대로 영화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걸 TV 드라마가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예컨대,
<로스트> 같은 복잡다단하고, 수많은 인물들이 뒤섞이는, 그래서 인물 개개인의 과거사까지 훑는 일이 영화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연재만화로도 증명된 부분이다. 만화는 같은 이야기라도 역시 TV 드라마처럼 무한정 권수를 늘려가며 연장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읽는 속도의 차이에 의해 누군가에게는 러닝타임이 10시간 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는 100시간 일수도 있다. 여기서
역시 시간의 문제가 대두된다. 가령 미드 중 <CSI> 같은 정밀한 범죄 스릴러물, 혹은 <ER>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의학드라마는 전문지식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전개와 무관하게 낯선 용어나 상황들을 해설할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분명 2시간 안팎의 장편영화가 끌어안기 힘든 부분이다.
이제는 제한된 시간 말고도 특수효과라는 측면에서 미드가 더 큰 아이디어를 발휘할 때가 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이라는 절대적 차이를 차치하고라도, 소위 영화가 미드보다 더 후져 보일 때가 종종 목격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가 TV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식의 기존 영화의 자존심 혹은 그 오랜 우월성을 깨는 일이다. 가령 최근 개봉한 <넥스트>의 경우
크리스(니콜라스 케이지)는 2분 뒤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와 비교되는 인물은 최근 인기 TV 시리즈인
<히어로즈>의 히로(마시 오카)인데, 크리스와 비슷하게 시간을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 그가 시공을 오가는 모습은 <넥스트>와
비교해도 더 나아 보인다. 물론 <히어로즈>에서 타인의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캔디스(미시 페레그림)의 경우는
<엑스맨>에서 같은 능력을 지녔던 미스틱(레베카 로마인 스타모스)의 특수효과보다 훨씬 떨어지긴 한다.
최근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는 1시즌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히어로즈> 특집과 함께, 영화와 TV 시리즈를 가리지 않고 지난
25년간의 ‘베스트 SF 25’를 발표했다. 1위가 <매트릭스>(1999), 2위가 'Sci Fi 채널'의 TV 시리즈
<배틀스타 갈락티카>(2003-)다. 더불어 25편 중 11편이 TV 시리즈니 딱히 영화의 압도적 우위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마도 현재의 영화들이 TV 드라마와의 승부 그 이상으로, 무언가 새로운 걸 보여주기 힘든 위기의 시대와 맞닥뜨렸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이것은 또한 TV는 저급하다는 식의 인식을 떠나 그 어떤 상품화의 과정도 미학과 관계돼 있다는, 즉 “소비사회의 모든 것이 미적 차원을
떠맡았다”는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제 미드는 영화의 뒤를 좇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누군가 <로스트>에 대해 “TV 드라마 역사의 <시민 케인> 같은
작품이었지”라고 말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
댓글 없음:
댓글 쓰기